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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호박에 줄을 긋는다

거울을 보다가 깜짝 놀랄 때가 있다.“이게 누구야? 내 얼굴이 맞아?”40대의 임신, 출산, 육아는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흔히 말하는 분노의 트라이앵글 ― 수면 부족, 육아 스트레스, 그리고 체력 고갈. 그 결과 나는 급격히 늙었다. 예전엔 없던 팔자주름이 깊게 파였고, 이마 위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자리를 잡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은 탈모였다. 머리카락이 숭숭 빠져 나가더니 어느 날 보니 정수리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TV 광고 속 ‘풍성한 모발’은 나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 같았다. 결국 나는 큰 결심을 하고 평생 처음으로 증모술을 했다. ‘나도 한 번쯤은 머리 숱의 기적을 맛보자!’ 싶었다. 돈을 꽤 들였으니, 풍성한 머리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글쎄, 좀..

봉선화 부녀 사용 설명서

가수 현철의 노래 처럼, 우리 집에는 유난히 섬세한 봉선화 두 송이 꽃이 산다. 바로 남편과 아이, 나는 이들을 ‘봉선화 부녀’라 부른다. 손만 스쳐도 “톡” 하고 상처 입는 꽃잎 같아서다. 사실 남편은 연애 시절부터 그랬다. 다투다가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음을 드러내곤 했다. 그 눈물이 나를 붙잡았고, 결국 결혼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살아보니 남편의 눈물은 특별한 순간에만 터지는 게 아니었다. 사소한 말다툼에도, 서운함이 스칠 때에도 흘러내렸다. 그 앞에서 나는 늘 단호한 척하다가도 결국 마음이 약해져 사과를 하곤 만다. 아이까지 태어나자 상황은 더 흥미로워졌다. 아이가 아빠를 빼닮아 눈물도 많고 감수성도 풍부한 것이다. 그러니 나 혼자만 번개처럼 성격 급하게, 경상도 사람이라 말이 짧고 직설적이다 ..

시자의 시금치가 그리운 날

나는 서른아홉에 결혼을 했다. 남편은 마흔넷. 둘 다 초혼이었지만 나이로 치자면 많이 늦은 결혼이었다. 그래서인지 집안에서는 크게 반겼다. 나 스스로는 결혼에 큰 기대도 이유도 없었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알 수 없는 힘에 휘말려 며늘아기가 되었다. 그것도 너무 늦은 며늘아기가. 시어머니는 참 강한 분이셨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홀로 아이들을 키우셨고, 알코올에 의지하던 시아버지와 시댁 식구들까지 돌보며 억척스럽게 살림을 하셨다. 그럼에도 언제나 단정하고, 선이 굵은 얼굴에 시원한 말투를 지니신 분이었다. 나로서는 늘 어렵고 낯설었다. 집 아래 살던 시누이와 조카까지 더해져, 나는 자꾸 겉도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어리석고 서툴렀다. 어머니가 주말에 함께 밥을 먹자고 하셔도 남편이 ..

어린이집 놀이터에서 엄마 사회학

"엄마, 놀이터 가자!"어린이집 하원 시간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아이의 외침.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억지춘향으로 놀이터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놀이터는 단순히 아이들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엄마들의 또 다른 사회, 그야말로 '엄마 사교계'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처음엔 어색한 눈인사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벤치에 둘러앉아 수다꽃을 피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이 이야기에서 시작해 남편 불만, 아직 생기지도 않은 둘째 계획까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40대 늦깎이 엄마인 나와 달리, 다른 엄마들은 대부분 30대 초중반의 젊은 엄마들이었다. 처음엔 나이 차이가 부담스러웠지만, 육아의 세계에서는 아이 순서가 더 중요했다. 첫째 엄마끼리는 서로..

안녕하세요? 면목동 우륵입니다.

황금보다 귀한 자유 시간이 생겼다.매일 붙잡히던 작은 손이 떨어져 나가자,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가 낯설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채울까.” 잠시의 고민 끝에 나는 집 앞 문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야금을 배우기로 했다. 처음엔 그저 여유로운 취미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수업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었다. 나는 서둘러 당근마켓에서 10만 원짜리 가야금을 들여놓고, ‘면목동 우륵’이 되겠다 다짐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줄은 모두 엉망으로 조율돼 있었고, 박치에 음치인 나는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보다 못한 남편이 유튜브를 뒤져 악기를 맞춰주었고, 나는 다시 신나게 현을 뜯었다. 친정에 입문 소식을 알렸을 때, 돌아온 반응은 차가웠다.“아이나 잘 키워라.”“음악은 장난이 아니..

독하게 도서관

육아 이전의 나에게 도서관이란, 그저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대여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끔 시험 기간이 되면 "아, 집중이 안 되네" 하며 무거운 엉덩이를 끌고 가서 열람실 한 귀퉁이에 앉아 벼락치기를 하던 곳. 신간 코너에서 "이런 것도 나오네?" 하며 눈요기나 하던 곳.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 출산 전의 나는 꽤나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소위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전형적인 워커홀릭. 주당 40~50시간 이상의 수업을 하면서도 "이 정도야 뭐~" 하며 어깨를 으쓱하던 사람. 학생들의 관심과 좋은 강의평가를 받으면 은근히 뿌듯해하며 "역시 내가 좀 괜찮은 강사지?" 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던,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시간이 물처럼 넘쳐났고, 나는 그 ..

꿔다놓은 보릿자루와 영재 사이

아이를 낳기 전의 나는 참으로 순수했다.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만 있으면 돼!" 하며 건강한 아이만 바랐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만 해도 다른 엄마들이 왜 그리 영재, 영재 하며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이집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나도 어느새 '그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우리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그 자체라는 것이다. 낯가림이 유독 심한 우리 아이는 키즈노트 사진에서 좀체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아이들이 신나게 손을 들고 발표하고 웃고 떠들 때, 우리 아이는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거나 아예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오후 3~4시쯤 키즈노트 알림이 뜨면 설레는 마음으로 확인하지만, 우리 아이 독사진은 고사하고 뒷모습이라도 나오면 다행이다. ..

마흔 다섯살 재능

어린 시절 나에게 그림은 전부였다. 밥을 거르고 그림을 그려도 행복했던 그 시절, 연필로 종이 위에 선을 긋는 순간만큼은 세상 그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 하셨다. "맨날 가시나 대기라만 그리고 있다"며 내가 정성스럽게 그린 그림들을 폄하하고 흠집내기 일쑤였다. 그 말들은 어린 내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고, 나는 점차 꿈을 숨기는 법을 배워야 했다. 집에는 나와는 정반대인 여동생이 있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던 여동생은 즉흥적이고 당당했다. 우유부단하고 행동이 굼뜬 나와 달리, 여동생은 자신의 욕구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아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무용을 시켜주지 않는다며 가출까지 했던 여동생의 모습은, 엄마가 무서워 몰래몰래 그림을 그리던 나에게는 경이로운 용..

카테고리 없음 2025.09.02

선생님의 대나무숲

지난 학기, 26개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예정에 없던 복직을 한 나는 매일이 전쟁 같았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과 일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흔들리며,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었다. 그런 바쁜 일상 속에서 새로 온 강사 선생님이 내 교실을 자주 찾아왔다. "선생님, 학생들이 늦게 오면 어떻게 하세요?" "상담일지는 보통 어떻게 작성하시나요?" "출결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처음에는 당연한 질문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슷한 질문들이 반복되고, 사무실에 물어봐야 할 것 같은 내용들까지 나에게 묻다 보니 조금씩 부담스러워졌다. 아이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상황에서 그녀의 방문이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녀가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이 내 마음에 걸렸다. "선생님, 혹시 학생..

많이 극성맞아요! -북극성 토론모임-

작년 3월, 독서토론리더 연수를 시작할 때의 나는 어딘가 우쭐해 있었다. 국문학과 출신에 20년간 국어를 가르쳐온 경력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첫 모임에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육아에 지쳐 겨우겨우 책을 읽어온 나와는 달리, 60대 선생님들의 논제는 날카로웠고 질문은 예리했다.6개월의 연수 과정을 거쳐 8명에서 6명으로 줄어든 우리 기수. 60대 4명, 50대 1명, 그리고 막내인 40대 나. 전직 교사, 공무원, 회사 임원이셨던 어르신들의 해박한 지식은 그들이 내뿜는 언어 하나하나에 스며있었다. 어느새 나는 복사물 인쇄하고 뒷정리하며 회의록 정리하는 조교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솔직히 처음엔 불만투성이었다. 반말이 오가고 깜빡이 없이 무턱대고 끼어드는 토론..